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르후 전투 (문단 편집) ==== 명나라군 ==== 명군의 전략은 4개 방면에서의 분진 합격으로, 사르후에서 만나 후금의 수도인 허투알라를 포위하여 후금군을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명나라는 후금보다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 4개의 부대는 사실 동서남북이 아니라 모두 허투알라의 서쪽에서부터 출발한 병력이었다. 명나라에서도 후금을 가볍게 보지 않고, 당시에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에이스들로 지휘부를 꾸렸다. 총사령관 '''양호'''는 한국의 일부 사극(<[[불멸의 이순신]]>) 및 임진왜란을 다룬 일부 서적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바람에 졸장으로 여겨지지만, 당시 명나라에서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에이스였다.[* 양호는 [[1555년]]생으로, 당시에는 64세였으며, 명나라군 최고 원로급이었다. 그러니까 실전과 행정 경험도 있는 [[문무겸비]]의 최고참급 장수였고, 그리하여 명나라의 국운을 건 원정에 총사령관으로 발탁된 것이었다.] 원래 과거 급제자로 문신 출신이었지만 지방 행정관을 하다가 몽골의 침략을 물리쳐 군재가 있음이 발견되었고, 그 이후로는 장수로 나서게 된 케이스였다. 과거 급제자인만큼 조정과 지방을 오가며 중앙 요직을 맡고 있다가 변경이 위급하면 야전사령관으로 파견되었다. 사르후 전투 직전에도 당상관급인 병부우시랑(조선의 병조참판급)을 하다가 현장 지휘관에 발탁되었는데, 병부시랑은 병부상서(조선의 병조판서)로 가는 요직이었으며[* 역대 명나라의 병부상서들은 모두 이 자리를 거쳤다.], 만약 사르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면 병부상서로 임명되었을 것이다. '''유정'''과 '''이여백'''[* [[이성량]]의 아들이며, [[이여송]]의 동생이다. 그리고 후금에 귀순한 [[이영방]]은 그의 아들이었다.]은 모두 임진왜란에 참전한 바 있었고, '''두송'''은 몽골 및 오이라트와의 전쟁에서 이름을 떨쳤으며 '''마림'''은 문신에 가까웠으나, 명장 마방의 아들로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전략전술을 배웠는데, 마방은 몽골 튀메드부의 영웅 [[알탄 칸]]을 패퇴시킨 바 있었다. 명나라는 후금의 싹을 말려버리려 했고, 전국 각지에서 가용가능한 병력을 모두 긁어모았다. 만주 지역의 병력뿐만 아니라 당시의 중국의 서쪽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사천성]]이나 남쪽 끝이라고 할 수 있는 [[광동성]]의 병력까지도 수천 km가 떨어진 만주까지 동원했을 정도였다. 사료에는 병력수가 무려 200,000명에 달했다고 나오나 실제로는 그 반정도였을 것이다.[* 각 방면 부대의 병력수 최대치는 《[[청사고]]》의 기록인데, 청나라 측이 과장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는 반정도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명나라는 누르하치의 목을 가져오거나 사로잡는 장병에게는 은 10,000냥[* 1냥(37g)의 가치는 2023년 가치로 약 40,000원 정도 된다. 즉 4억원을 주는 셈인데, 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당시의 은의 가치는 훨씬 더 높았다.]의 상금과 도지휘사의 벼슬을 내걸었다. 그리고 버일러(패륵)급의 목을 가져오면 은 2,000냥과 지휘사의 벼슬을 내리며, 누르하치에 귀순한 한족들에게는 다시 배신을 유도하기 위해 오랑캐 장수의 목을 들고 재귀순하면 죄를 면해주겠다고도 공포했다. 다음은 명나라군의 편제이다. 총지휘 경략[* '''경략'''은 명나라에서 대규모 대외원정이 있을 때 임시로 부여하는 총사령관급이었다.] 양호: 직속부대는 수천 명~15,000명이었으며,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양호의 직속부대는 심양에 머물러 있었고, 이는 첫 번째 회전이 벌어진 사르후에서 약 50km 밖에 떨어져 있었다. * 서로군(총병 두송[* '''총병'''은 9단계의 명나라 군대 계급에서 2번째로 높은 계급이었다. 현대로 치면 군단장급 정도 된다.]): [[심양]]에서 출발, 총병력 29,000~60,000명 * 북로군(총병 마림): 개원에서 출발, 총병력 30,000~40,000명. 여기에는 해서여진 예허부의 긴타이시 휘하 병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 동로군(총병 유정): [[단동]]에서 출발, 총병력 25,000~40,000명. [[강홍립]]이 지휘하는 조선군 병력은 여기에 속해 있었다.[* 강홍립이 지휘하는 조선군 병력은 13,000명 정도여서, 유정이 거느린 명나라 군대보다 많았지만, 조선군은 유정의 지휘를 받았다.] * 남로군(총병 이여백): [[요양]]에서 출발, 총병력 22,000~60,000명 '''문제는 이들 장수들이 서로 사이가 매우 나빴다는 점이다.''' 특히 경략 양호와 총병 유정은 견원지간이었고, 북로군의 사령관 마림은 휘하 지대의 범종안과 사이가 나빴다. 보통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의 패배에 대해 두송 등의 현장 지휘관들이 제멋대로 행동한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이 5명의 명군 고위 장수는 참패한 후 모두 제명을 못살았다. 유정과 두송은 전사했고, 마림은 부상당했으나 자신의 부대 주둔지인 개원으로 후송되었다가 그곳을 급습한 후금군과 싸우다가 전사했고, 이여백은 자결했다. 양호는 패전의 책임으로 10년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의종 숭정제가 즉위한 후 참수되었다. 어쨌든 명나라가 적을 얕보지 않고 대군을 동원한 것은 합리적인 것이었으나, 문제는 누르하치의 지략이나 후금군의 전투력이 명나라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날씨나 지형과 같은 요소마저도 후금의 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